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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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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광윤은 오대 십국 시대의 혼란을 종식하고 송나라를 건국한 인물이다. 그는 927년에 태어나 후주의 장군으로 활약했으며, 고평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960년, 진교의 변을 통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송나라를 건국한 후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며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문치주의를 통해 안정된 통치를 추구했으며, 976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는 동생 조광의가 황위를 계승했으나, 조광윤의 급사 원인을 두고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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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태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송 태조
국립고궁박물관, 타이베이, 중화민국 소장, 궁중 초상화 족자
조광윤
일설에 따르면 원랑
묘호태조
시호계운입극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
출생927년 3월 21일
출생지낙양, 후당
사망976년 11월 14일
사망지개봉, 북송
묻힌 곳영창릉 (현재 궁이 시, 허난성)
배우자효혜황후 (944년 결혼, 958년 사망)
효명황후 (958년 결혼, 964년 사망)
효장황후 송씨 (968년–976년 결혼)
자녀조덕소
조덕방
선숙공주
선정공주
선혜공주
아버지조홍은
어머니소헌황후
송 태조 서명
송 태조 어압
통치
재위 기간960년 2월 4일 – 976년 11월 14일
즉위960년 2월
후계자태종
연호건륭 (960년 2월 4일 – 963년 12월 3일)
건덕 (963년 12월 4일 – 968년 12월 15일)
개보 (968년 12월 16일 – 977년 1월 21일)
왕조
왕가조씨
왕조 (북송)
추존
존호응천광운대성신무명도지덕인효황제

2. 생애

후당의 금군 장교였던 조홍은(후주의 무청군 절도사·태위로 추증되었으며, 송에서 선조의 묘호를 추증)이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두씨이다. 후당의 천성 2년(927년)에 낙양협마영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막주청원현이다. 후한 초에는 불우한 처지여서 각지를 전전했지만, 양양의 어느 절의 노승의 권유를 받아, 후에 후주의 태조가 되는 후한의 추밀사곽위의 군에 몸을 던졌다.

후주의 세종이 즉위하자 근위군의 장교가 된다. 북한의 군을 맞아 싸운 고평의 전투에서는 좌익의 군세가 패주하여 후주군이 위기에 빠진 가운데, 조광윤은 동료들을 격려하고, 북한군의 전위를 격파하는 활약을 하여 후주에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세종의 남당 정벌에 종군하여, 남당의 절도사였던 황보휘·요봉 등을 스스로 사로잡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후, 양주를 공격하던 동료 한령곤이 남당의 원군을 앞에 두고 철수를 요청하자, 세종으로부터 원군으로 파견되어 "만약 도망가는 자가 있으면 그 발을 베겠다"라고 독전하며, 한령곤 등의 필사적인 방어전 끝에 남당군 만여 명의 수급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그 후에도 조광윤은 잇따라 남당의 성채를 함락시켰다.

조광윤의 위명을 두려워한 남당의 이경은 조광윤과 세종 사이를 이간질하려 조광윤에게 편지와 백금 3천 냥을 보냈지만, 조광윤은 모두 세종에게 헌상하여 군신 간의 균열은 생기지 않았다.

세종이 붕어하고, 겨우 7세의 공제가 즉위하자, 이를 틈타 북한의 군세가 쳐들어왔다. 그들을 맞이하는 군을 이끄는 중에, 진교역에서 어린 군주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군사들에 의해 황제의 상징인 황의를 입고 황제로 추대된다(진교의 변). 조광윤은 군사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따를 것을 확인하고, 공제와 황태후의 부씨, 그리고 여러 대부들에 이르기까지 결코 해를 가하지 않으며, 관고에서부터 서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결코 침탈하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한 후에, 제위에 즉위하는 데 동의했다. 개봉으로 돌아온 조광윤은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고, 국호를 송으로 고쳤다.

그 후, 각지에 할거하는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지만, 남은 것은 오월과 북한뿐이어서 천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976년, 50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그 사인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동생인 태종 조광의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설(천재불결의 의)이 끈질기게 남아 있지만,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시테이를 비롯한 일부 연구자들은 생전의 태조가 진교의 변 때 보였듯이 엄청난 애주가였던 점을 들어, 뇌출혈 등의 질환으로 인한 급사였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붕어 다음 해인 태평흥국 2년(977년) 정월에 '''태조'''의 묘호가 추증되었고, '''영무성문신덕황제'''로 시호되었다.

시호는 대중상부 원년(1008년) 8월에 진종에 의해 '''계운립극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로 개정되었다[17]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조광윤은 927년 후당(後唐) 뤄양(洛陽)에서 군인 가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북성 탁군(涿郡)이다.[21] 그의 가문은 당나라 때부터 관직을 역임했으며, 증조부부터 군벌 아래에서 군관으로 공로를 쌓아왔다. 아버지 조홍은(趙弘殷)은 후당, 후진(後晋), 후한(後漢)에서 금군 장교로 복무하였다.[21] 조광윤은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기마 궁술에 능했다. 한번은 고삐 없이 길들여지지 않은 말을 타다가 성문 위에 있는 벽에 이마를 부딪혀 떨어졌지만, 곧바로 일어나 말을 쫓아가 마침내 말의 고삐를 잡고 무사히 길들였다는 일화가 있다.

946년 20세에 군문에 입대, 후한(後漢)의 추밀사(樞密使) 곽위(郭威)의 막료가 되었다. 949년, 아버지의 정략 결혼으로 허씨 부인과 결혼하였다.[4] 몇 년 동안 방랑한 후, 후한의 절도사(군사 지휘관)인 궈웨이의 군대에 입대하여 리서우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2][5] 951년 곽위가 후주(後周)를 건국하자 금군 군관(禁軍軍官)으로 임명되었다.[21]

후주 세종 시영(柴榮)의 부하가 되어 근위군의 장관이 되었다. 이후 시영을 따라 남정에 참여하였으며 양주(揚州) 등지를 공략했다. 후주에서 광국절도사(匡國軍節度使),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를 거쳐 검교태위전전도검(檢校太傅殿前都檢), 금군총장령(禁軍總將領)을 역임했다.

954년 고평 전투에서 북한과 요나라의 연합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웠다. 시영 즉위 후 유숭이 요나라와 협력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된 이 전투에서, 초기 대결에서 범애능과 하휘가 이끄는 군대의 우익이 패배하였다. 상황을 지켜본 조광윤과 장영덕은 정예 궁궐 병력 4,000명을 이끌고 요나라 군대에 맞섰다. 황제에 대한 충성을 촉구하는 조광윤의 외침은 사기를 빠르게 북돋았다. 소규모 병력은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더 큰 요나라 군대를 막아냈고, 결국 성공적인 반격으로 북한군은 태원시로 후퇴했다. 이 승리로 조광윤은 궁궐 친위대 대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친위대를 재편성하고 훈련시켰다.

이후 석수신, 왕심기, 양광의, 왕정충, 유경의, 유수충, 유연양, 미신, 전중진, 반미, 그의 동생 조광의, 심의륜, 노서경, 조보, 초소보 등 궁궐 수장과 관련된 다른 장군 및 관리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몇 년 안에 조광윤은 궁궐 친위대를 완전히 장악했고, 그를 따르는 관리들을 구축했다. 곧 그는 절도사(군사 지사)로 승진하여 시영 휘하의 대부분의 군사력을 통제하게 되었으나, 장영덕과 이충진이라는 두 명의 경쟁자가 있었다. 959년, 조광윤이 놓은 함정으로 인해 장영덕은 강등되었고, 시영이 죽은 후 이충진은 정치적 지원이 부족하여 조광윤에 의해 양주 절도사로 전출되었다.

2. 2. 진교의 변과 송나라 건국

960년, 후주의 어린 황제 시종훈(공제)이 즉위하자, 군인들은 자신의 수장인 조광윤이 권력을 쥐는 것을 원했다.[21] (거란)와 북한이 연합하여 후주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상 범지는 조광윤을 보내 이 동맹에 맞서게 했다.[6] 조광윤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카이펑 북방의 진교(陳橋)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숙영하던 중, 조광윤은 술에 취해 잠들었고, 그 사이 부하 장수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다.(진교의 변)[21]

후주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는 조광윤의 20세기 삽화.


병사들은 조광윤에게 황제의 상징인 황포를 입히고, '만세'를 외치며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21] 조광윤은 처음에는 황제 즉위를 거부했으나, 장교들의 강요와 "군대에 주인이 없다. 장군을 새 황제로 만들겠다."는 병사들의 외침에 결국 황제 즉위에 동의했다.[6] 그는 군대가 도시를 약탈하거나 백성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7]

조광윤은 개봉으로 돌아와 공제로부터 선양받는 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송(宋)으로 정했다.[7] 이 과정에서 조광윤은 후주의 재상 범질(范質), 왕부(王溥) 등과 협상하여 시씨(柴氏) 가문을 보호하기로 약속했다.[7]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북송 건국 후 조작된 것으로, 실제로는 조광윤이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요나라 역사서에는 당시 북한과 요나라의 연합 공격에 대한 기록이 없고, 총사령관이 출정 중 술을 마셨다는 점, 부하들이 황제만 입는 황포를 입혔다는 점 등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2. 3. 통일 전쟁

과거제도의 정비와 내치의 안정을 바탕으로 송 태조 조광윤은 통일 전쟁을 시행하였다.[8] 963년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요지라 할 수 있는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했다. 965년에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고 이 땅의 풍부한 물산을 빼앗아 전쟁 비용을 보충했다. 970년경이면 조광윤은 중국의 북부지역을 거의 통일하게 된다. 한편으로 만리장성 안을 넘보던 거란족의 요나라를 정벌하고 후진 때 빼앗겼던 연운 16주를 수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971년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다.[8] 그리고 975년 화남에서 최대세력을 자랑하던 남당을 멸망시키게 되었다.[8]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뿐이었지만 태조는 당돌에서 병사했다.

태조가 조보와 함께 cuju를 하는 모습, 원나라 화가 전선 (1235–1305) 그림


960년, 송나라 건국 이전 907년 당나라 멸망 이후 분열과 반란으로 혼란스러웠던 중국 본토를 조광윤이 재통일하는 데 기여했다. 시종 재위 기간에 세워진 계획은 먼저 북쪽을 정복한 다음 남쪽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태조 재위 기간 동안 전략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후촉, 남한, 남당과 같은 작은 국가들을 모두 정복하려 했다. 예외는 요나라의 거란족의 지원을 받는 태원에 위치한 강력한 북쪽의 북한이었다. 태조의 전략은 요나라가 북한을 지원했기 때문에 북쪽보다 약한 남쪽의 독립 국가들을 장악하는 것이었다.[8]

968년, 태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한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그의 군대가 방어선을 뚫고 태원을 포위했지만, 요나라 기병대가 지원을 오면서 북한의 방어선을 공격한 후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의 초상화


태조는 이후 송나라 황제들을 위한 핵심적인 송조 조규와 정책을 수립했다. 그는 과거제도를 확대하여 대부분의 문관들이 시험을 통해 채용되도록 한 것으로 기억된다 (문관의 10% 미만이 시험을 통해 채용된 당나라와 대조적으로). 그는 또한 많은 토론과 사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학원을 만들어 과학 발전, 경제 개혁, 예술 및 문학 분야의 성과를 촉진했다.

태조는 군대의 권력을 통제하고, 군벌 시대를 종식시키고, 지역 사령관에 대한 국가의 권력을 집중시켜 그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것을 막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8] 황제가 되자 그는 장군들을 호화로운 연회에 초대하여 그들에게 군사 지도자에서 은퇴하거나 작은 직책을 수락하도록 설득했다.[8] 그는 광대한 영지와 넉넉한 퇴직 기금 및 혜택을 제공했다.[9] 연회 중 어느 시점에서 새 황제는 모인 군 장교들에게 연설을 시작했는데, 그는 그들을 왕위에 앉혀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하며, 이제 그렇게 할 권한이 생겼으니 그의 능력 안에서 최대한 보상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여러 군대를 지휘하는 동안 그의 새로운 왕좌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 문제의 파급 효과를 제대로 고려한다면 그들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퇴직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행복하고 조화롭게 살 것이라고 진심으로 약속했다. 결국, 장군들 중 누구도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고, 이로써 그가 건국한 송나라의 기간 동안 비교적 내부적인 평화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경쟁적인 주변 제국과의 관련을 위해 군대를 더 잘 확보했다.

태조는 연운 16주를 매입하거나 군사 행동 자금 지원을 통해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비 금고를 설립했다.[11] 그는 사망하기 전에 이를 회복하기 위한 군사 원정을 시작했으며, 그의 후계자는 두 번 더 시도하여 송나라와 요나라 간에 25년간의 산발적인 전투를 초래했다.[11]

2. 4. 정책과 통치

조광윤은 오대십국 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안정된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8] 군사적으로는 절도사(節度使)의 권한을 축소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961년,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을 통해 금위군(禁衛軍) 장수 석수신(石守信) 등 군벌 세력을 약화시키고, 금군(禁軍)을 강화하여 황제의 군사적 권한을 강화했다.[8][9] 이는 지방 군벌에 의한 군웅할거 국면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왕언초(王彦超) 등 여러 절도사들의 병권도 박탈하고, 지방의 행정과 재정을 모두 중앙으로 복속시켰다.[10]

정치적으로는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확립하고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능력 있는 관료를 등용했다. 유학자 출신 조보(趙普)의 건의를 받아들여 인재 채용에 힘썼으며, 전시(殿試)를 도입하여 황제가 직접 관리를 선발하고, 사대부(士大夫)를 우대하여 문신 중심의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11] 그는 관료들에게 독서를 권장하고, 문관 등용에서 신분을 따지지 않고 평등한 과거 경쟁을 통해 문관들을 대거 발탁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을 장려하고 수리 시설을 정비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했다. 수리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로 조성하거나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드는 것을 장려했다.

조광윤은 관용적인 통치를 추구했다. 석각유훈(石刻遺訓)을 통해 시씨 가문과 사대부를 보호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18][19][20] 석각유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광윤에게 황위를 양위한 시씨(柴氏) 일족을 자자손손 돌볼 것.
  • 언론을 이유로 사대부(관료/지식인)를 죽여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정책들은 송나라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했으며, 조광윤은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 5. 죽음과 계승 분쟁

976년 10월, 조광윤은 병으로 자리에 누워 동생 조광의를 불러 대리청정을 시켰다. 11월, 북벌을 계획하던 중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조광윤의 사후, 아들들인 연왕 조덕소와 진왕 조덕방이 아닌 동생 조광의가 황위를 계승했다. 조광윤의 두 아들은 조광의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조광의가 조광윤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민간 설화에서는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태조가 왕위를 노린 동생에게 살해당했다는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12][13]

영창릉에 있는 태조의 묘, 공의, 정저우


태종 이후 왕위는 태조의 아들이 아닌 태종의 아들과 후손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고종 황제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1161년에 양자로 태조의 후손을 선택하여 계승하게 하면서, 이후 모든 송나라 황제는 조광윤의 두 아들인 조덕소와 조덕방을 통해 태조의 후손이 되었다.[12] 조광윤의 유해는 공의 근처 영창릉에 안장되었다.[12]

3. 가족 관계

조광윤의 가족은 비교적 평범한 가문 출신으로, 그들의 계보는 후당 시대 이전까지 확실하게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그의 증조부인 조조(趙調)는 가족이 살던 근처인 허베이성 탁주에서 벼슬을 했다. 그의 후손인 조정(趙廷)과 조경(趙景) 역시 허베이성에서 지방 관리로 일했다. 조경의 아들 조홍은 문관의 길을 포기하고 대신 후당의 장종 아래에서 무관이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는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무관의 길이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조부''' : 익조(翼祖) 간공황제(簡恭皇帝) 조경(趙敬)
  • '''조모''' : 간목황후(簡穆皇后) 유씨(劉氏)
  • '''부친''' : 선조(宣祖) 소무황제(昭武皇帝) 조홍은(趙弘殷)
  • '''모친''' : 소헌황후(昭憲皇后) 두씨(杜氏)

송 태조의 어머니 두 태후

  • 형님 : 조왕(曹王) 조광제(趙光濟)
  • 동생 : 송 태종 조광의(趙光義)
  • 동생 : 위도왕(魏悼王) 조정미(趙廷美) (947년 ~ 984년) - 이복 동생.
  • 동생 : 지왕(岐王) 조광찬(趙光贊)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능묘비고
군부인(郡夫人)효혜황후
(孝惠皇后)
하씨(賀氏)[22](추존)929년 ~ 958년하경사(賀景思)안릉
(安陵)
[23]
황후(皇后)효명황후
(孝明皇后)
왕씨(王氏)[24]960년 ~ 964년942년 ~ 964년창덕군절도사(彰德軍節度使)
왕요(王饒)
안릉
(安陵)
황후(皇后)효장황후
(孝章皇后)
송씨(宋氏)[25]968년 ~ 976년952년 ~ 994년형국장혜공(邢國莊惠公)
송악(宋偓)
후한(後漢)
진국장공주(秦國長公主)
유씨(劉氏)
영창릉
(永昌陵)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별칭비고
1등왕(滕王)혜(慧)조덕수(趙德秀)효혜황후 하씨요절함.
2연왕(燕王)의(懿)조덕소(趙德昭)951년 ~ 979년효혜황후 하씨5남[26]
3서왕(舒王)조덕림(趙德林)효혜황후 하씨요절함.
4진왕(秦王)강혜(康惠)조덕방(趙德芳)959년 ~ 981년효명황후 왕씨3남 1녀[27]



-봉호(공주)봉호(제희)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별칭비고
1위국대장공주
(魏國大長公主)
현숙대장제희
(賢肅大長帝姬)
현숙(賢肅)? ~ 1008년효혜황후 하씨하중부윤(河中府尹)
왕승연(王承衍)
[28]
2노국대장공주
(魯國大長公主)
현정대장제희
(賢靖大長帝姬)
현정(賢靖)? ~ 1009년효혜황후 하씨서평군개국공(西平郡開國公)
석보길(石保吉)
[29]
3진국대장공주
(陳國大長公主)
현혜대장제희
(賢惠大長帝姬)
정혜(貞惠)
공혜(恭惠)
? ~ 999년길주자사(吉州刺史)
위함신(魏咸信)
[30]
4신국대장공주
(申國大長公主)
안혜대장제희
(安惠大長帝姬)
요절함.
5성국대장공주
(成國大長公主)
현혜대장제희
(顯惠大長帝姬)
요절함.
6영국대장공주
(永國大長公主)
선혜대장제희
(宣惠大長帝姬)
요절함.


4. 평가

조광윤은 오대십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송나라를 건국하여 중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역량을 겸비하였으며, 관용과 포용의 정신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정변으로 집권하였으나 전임 국가인 후주의 시종훈을 살해하지 않고 그의 생명을 지켜주었으며, 석각유훈을 통해 시씨의 자손을 보호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는 주자로부터 덕망높은 군주로 칭송받았으며, 후대의 학자들도 이를 인정하였다. 시씨의 후손들은 조광윤의 배려에 감읍하여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송조의 유신들과 함께 몽골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송사』는 조광윤을 요·순, 은의 탕왕, 주의 무왕 이후, 잇따른 난세로 황폐해진 사회를 구원한, 사성인에 필적하는 재능을 가진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건국 후 번진의 병권을 빼앗고, 장리(뇌물을 탐하는 관리)를 처형하는 등 기강을 다잡아 난세의 재발을 막고, 농업과 학문을 장려, 형벌을 경감하는 등 태평성대를 구축한 위대한 창업 군주로 평가한다. 조광윤의 재위 17년간이 송 왕조 300년의 번영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광윤은 여러 차례 "부모가 병에 걸려도 돌보지 않는 자는 벌한다", "부모와 재산을 달리하는 자는 벌한다" 등, 당나라 말기 오대 십국 시대의 전란으로 황폐해진 질서를 재건하고자 하는 조서를 내렸다. 『송사』는 당말 오대 십국 시대의 전란 시대에 황폐해진 도덕과 문화를 재건한 송 왕조는 한나라·당나라에 비해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5. 대중문화 속 조광윤

조광윤은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16세기 후반 웅대목(熊大木)이 쓴 소설 《남북양송지전(南北兩宋志傳)》은 926년부터 1022년까지의 중국 제국 시대를 다룬 역사 소설로, 처음 50장에서는 조광윤의 전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4] 1797년에 오선(吳璿)이 쓴 소설 《비룡전(飛龍傳)》은 조광윤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하고 무협적 요소를 추가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14] 1858년에는 "고고주인(好古主人)"이 쓴 《송태조 삼하남당 피곤 수주성(宋太祖三下南唐被困壽州城)》이라는 소설도 등장했다. 이러한 소설들에는 조경냥(趙京娘), 정은(鄭恩) 등 조광윤과 관련된 허구의 인물들이 등장한다.[14]

조광윤은 문신으로 중국 사원과 도교 사원에서 양곤과 함께 숭배되기도 한다.[14] 무술 분야에서는 소림을 기반으로 하는 무술 스타일인 ''태조장권''(太祖長拳)을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오늘날 장권 스타일의 핵심으로 여겨진다.[14]

조광윤을 중심으로 남당의 마지막 군주인 이욱오월의 마지막 군주인 전숙을 다룬 4D 영화 《천하통일》(一統江山)이 빌 어거스트 감독에 의해 기획 중이다.[15]

조광윤을 다룬 드라마로는 1988년 홍콩 드라마 《군사 통제》(兵權, 류자휘 주연), 1995년 중국 드라마 《조광윤》(趙匡胤, 조희광 주연), 1998년 대만 드라마 《천자의 운명》(真命天子, 임유성 주연), 2013년 중국 드라마 《조광윤》(趙匡胤, 천젠빈 주연) 등이 있다. 또한 2007년 TVB 드라마 《변천기》에는 곽봉이 조광윤 역으로 출연했다. 조광윤과 이후주의 관계를 다룬 드라마로는 1986년 싱가포르 드라마 《검과 노래》(絕代雙雄), 1996년 대만 드라마 《사랑, 검, 산, 강》(情劍山河), 2006년 중국 드라마 《이후주와 조광윤》(李後主與趙匡胤) 등이 있다.

조광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는 고마에 료의 『비룡전: 송 태조 조광윤』(고단샤, 2006년)이 있으며, 이는 2009년 『송 태조 조광윤』(고단샤 문고)으로 개제되었다. 조광윤이 등장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로는 양가장전기 형제들의 난세(2006년, 중국, 배우: 원해파), 경성의 황비 ~난세를 달리는 사랑과 야망~(2011년, 중국, 배우: 교임량), 대송전기지조광윤(2015년, 중국, 배우: 진건빈) 등이 있다.

6. 기타

그는 술을 좋아하였는데 이는 만년에 간질환과 과로로 쓰러지는 등의 후유증을 초래하였다. 일각에서는 그의 애주가 그의 병을 키웠고,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본다.

효명황후 왕씨는 비파와 쟁을 타는 실력이 뛰어났다[31]한다.

조광윤은 976년 북벌을 계획하던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덕소와 덕방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다. 이를 두고 그의 친동생 조광의가 제위를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조광윤의 두 아들 덕소와 덕방은 조광의에 의해 제거되었다.

민간 설화에서는 이 사건이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라는 고사성어로 전해지며, 조광윤이 왕위를 노린 동생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2][13]

태조는 17년 동안 재위했으며 976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공의 근처 영창릉에 안장되었다.

후촉을 멸망시킨 뒤 후촉의 왕이었던 맹창 내외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맹창이 죽자, 조광윤은 사작(詞作)에 능한 화예부인(花蕊夫人)을 불러 시를 짓게 했다. 화예부인은 망국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

:君王城上樹降旗 군왕이 성 위에 항복 깃발 세웠다지만

:妾在深宮那得知 첩은 깊은 궁에 있어 알 길이 없었네.

:十四萬人齊解甲 14만명이 모두 갑옷을 벗었다 하니

:寧無一個是男兒 남아는 하나도 없었던 것인가!

조광윤은 그녀의 굳은 충절에 감명받아 후궁으로 삼았다. 화예부인은 조광윤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설에는 화예부인의 재능과 미모 때문에 조광윤과 그의 동생 조광의가 서로 질투하고 다투었다고도 한다.[32] 조광윤은 맹창이 죽자 서둘러 화예부인을 후궁으로 맞이했다. 《노여록》(爐餘錄)에 따르면, '촉주가 죽자 곧 태조의 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조광의 역시 화예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32]

976년 겨울, 조광윤이 병으로 누워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조광의는 화예부인을 희롱했다. 이를 알게 된 조광윤이 분노하여 옥부(玉斧)로 바닥을 내리쳤으나, 결국 세상을 떠났다.[32]

6. 1. 독살설

조광윤은 976년 북벌을 계획하던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덕소와 덕방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다. 이를 두고 그의 친동생 조광의가 제위를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조광윤의 두 아들 덕소와 덕방은 조광의에 의해 제거되었다.

민간 설화에서는 이 사건이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라는 고사성어로 전해지며, 조광윤이 왕위를 노린 동생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2][13]

태조는 17년 동안 재위했으며 976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공의 근처 영창릉에 안장되었다.

6. 2. 화예부인

후촉을 멸망시킨 뒤 후촉의 왕이었던 맹창 내외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맹창이 죽자, 조광윤은 사작(詞作)에 능한 화예부인(花蕊夫人)을 불러 시를 짓게 했다. 화예부인은 망국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

{{인용문|

君王城上樹降旗 군왕이 성 위에 항복 깃발 세웠다지만

妾在深宮那得知 첩은 깊은 궁에 있어 알 길이 없었네.

十四萬人齊解甲 14만명이 모두 갑옷을 벗었다 하니

寧無一個是男兒 남아는 하나도 없었던 것인가!}}

조광윤은 그녀의 굳은 충절에 감명받아 후궁으로 삼았다. 화예부인은 조광윤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설에는 화예부인의 재능과 미모 때문에 조광윤과 그의 동생 조광의가 서로 질투하고 다투었다고도 한다.[32] 조광윤은 맹창이 죽자 서둘러 화예부인을 후궁으로 맞이했다. 《노여록》(爐餘錄)에 따르면, '촉주가 죽자 곧 태조의 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조광의 역시 화예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32]

976년 겨울, 조광윤이 병으로 누워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조광의는 화예부인을 희롱했다. 이를 알게 된 조광윤이 분노하여 옥부(玉斧)로 바닥을 내리쳤으나, 결국 세상을 떠났다.[32]

참조

[1] 서적 The Reunification of China: Peace through War under the Song Dynast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12-31
[2] 간행물 Song Shi
[3] 간행물 Song Shi
[4] 간행물 Song Shi
[5] 간행물 Zizhi Tongjian
[6] 문서 Paludan
[7] 문서 Paludan
[8] 서적 A History of China http://archive.org/d[...] St. Martin's Press
[9] 문서 Paludan
[10] 학술지 Charles Hartman, Translated by 陳元-曹勛与 "太祖誓約"的傳說,《中國史研究》2016年第四期,頁89-116. https://www.academia[...] 2016-01
[11] 서적 Beyond Power Transitions: The Lessons of East Asian History and the Future of U.S.-China Relation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4
[12] 서적 Branches of Heaven: A History of the Imperial Clan of Sung Chin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 Asia Center
[13] 서적 Celestial Women: Imperial Wives and Concubines in China from Song to Qing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6-04-21
[14] 웹사이트 The Longfist School of Emperor Taizu (太祖长拳) http://www.china.com[...] 2007-11-22
[15] 웹사이트 Danish Director: 'No Boundaries' in ''Unifying the Country'' http://www.bjreview.[...] 2020-02-04
[16] 문서 『飛龍全伝』に「姓趙。名匡胤。表字元朗。」とある。野史『羅雲村史』にもあり。正史『宋史』では字を記さない。
[17] 문서 宋史本紀太祖三による。本紀真宗二では啓運立極英武聖文神徳玄功大孝皇帝とする
[18] 문서 (陳 1992)
[19] 문서 誓詞三行:一云柴氏子孫有罪,不得加刑,縱犯謀逆,止於獄中賜盡,不得市曹刑戮,亦不得連坐支屬;一云不得殺士大夫,及上書言事人;一云子孫有渝此誓者,天必殛之。 http://zh.wikisource.org/zh/%E5%AE%8B%E7%A8%97%E9%A1%9E%E9%88%94 宋稗類鈔 参照。
[20] 문서 第1条の内容は、陳舜臣が紹介したものとやや異なっており、「柴氏の子孫が罪を犯しても処刑しないこと。謀反を起こした場合も獄中で賜死させ、(謀反人への処遇である)公開処刑は行わないこと、また一族に刑を連座させないこと」となっている。
[21] 문서 이나미 리츠코 저, 배신자의 중국사 (김석희 역, 작가정신, 2002) 223페이지
[22] 문서 회계군부인(會稽郡夫人)
[23] 문서 건국 후 추존됨.
[24] 문서 낭야군부인(琅邪郡夫人)
[25] 문서 개보황후(開寶皇后)
[26] 문서 무공군왕(武功郡王)/위왕(魏王)/오왕(吳王)/월왕(越王)
[27] 문서 흥원부윤(興元府尹)/담왕(潭王)/기왕(岐王)/초왕(楚王)
[28] 문서 소경공주(昭慶公主)/정국공주(鄭國公主)/진국장공주(秦國長公主)
[29] 문서 연경공주(延慶公主)/허국공주(許國公主)/진국장공주(晉國長公主)
[30] 문서 영경공주(永慶公主)/괵국공주(虢國公主)/제국공주(齊國公主)/허국장공주(許國長公主)
[31] 문서 샹관핑, 중국사 열전 후비:황제를 지배한 인물들(한정민 역, 달과소, 2008) 371페이지
[32] 문서 샹관핑, 중국사 열전 후비:황제를 지배한 인물들(한정민 역, 달과소, 2008) 40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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